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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김기범 _<로드테스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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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길의 동행

 

길의 주인공은 시대별로 변화해 왔다. 처음엔 사람의 두 발, 이후 말과 마차를 거쳐 한 세기 전부터 자동차가 장악했다. 초창기 자동차는 길에 적응하기 바빴다. 기술이 진화하면서 자동차는 좀 더 편안하고 빨라졌다. 이런 자동차를 소화하기 위해 길(도로) 또한 개선을 거듭했다. 최근 인공지능과 IT 기술을 접목하면서, 둘의 진화엔 나날이 가속이 붙고 있다.

 

 

시대별로
이동수단과 함께 진화해 온 길

 

최근 바람 쐬러 동해안을 찾았다. 고속도로만 달리기 지루해 국도로 빠졌다. 과거 횡계와 강릉을 잇던 대관령 옛길이다. 울창한 숲을 이웃한 채 굽이굽이 달리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과연 길은 누가 그리는 걸까?’ 별안간 호기심 병이 도져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찾아봤다. 가려운 곳을 속 시원히 긁어주는 답까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감을 잡기엔 충분했다.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도로교통 흐름의 목적과 운동 역학적 요구에 맞추면서 자연지형 및 사회조건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문득 시승하며 달렸던 길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프랑스 니스와 생트로페즈를 잇는 굽잇길, 스코틀랜드의 대평원을 관통하는 오프로드, 다랭이 마을을 굽어보며 돌아나가는 남해의 해안도로 등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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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고속을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독일 차를 낳은 토양이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길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류문명 발전의 기초이며 물자 운송로, 지식과 문화 및 기술 등의 전파로, 군사 이동로로서 인간집단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재화의 유통을 촉진시키는 수단’. 사전적 의미는 ‘차나 우마 및 사람 등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만든 거의 일정한 너비로 뻗은 땅 위의 선’이다. 길과 이동수단은 서로 영향을 주며 진화해 왔다. 사람이 두 발로 걸어 다닐 길은 굳이 널찍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말이 끄는 마차가 다닐 길은 사정이 달랐다. 하물며 2톤에 가깝고 시속 200㎞를 넘나드는 속도의 자동차가 누빌 길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어야 했다.

빠른 속도는 코너의 곡률 및 구배 설계에 영향을 미쳤다. 완만하고 매끈한 모양이 필요했다. 세계 최초이자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로 유명한 아우토반이 대표적이다. 수시로 보수공사를 벌이는 구간과 교통량이 많아 실제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구간은 기대 이상으로 많지 않다. 속도제한 구역에서 과속하다 걸렸을 때 벌금 또한 무겁다. 그러나 설계는 속도 무제한의 개념을 충실히 반영했다. 급격히 꺾이거나 코너 바깥쪽이 기운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탄탄하고 안정적인
독일 차 낳은 아우토반

 

길의 변화는 자동차의 디자인과 메커니즘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령 토요타가 초창기에 만든 트럭을 보면 바퀴 옆에 볏짚을 엮어 마치 치맛자락처럼 씌웠다. 비 온 뒤 군데군데 웅덩이가 도사린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주변 행인이 물벼락 맞지 않도록 배려한 안전장치였다. 또한, 노면 상태가 뒤죽박죽이던 과거엔 이제 없애는 추세인 스페어 타이어가 필수였다.
아우토반은 고속을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독일 차를 낳은 토양이다. 현재 독일 자동차 업계는 일부 스포츠 브랜드나 고성능 차종을 제외하면 최고속도를 시속 250㎞로 제한하고 있다. 안전을 위해서다. 그런데 제조사 스스로 빗장을 건 일종의 신사협정일뿐 법적구속력은 없다. 따라서 엔진제어장치(ECU)를 개조해 이 제한을 푸는 개조도 흔하다.
속도 무제한의 환경은 단지 속도뿐 아니라 차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최고속도를 시속 10㎞ 높일 때마다 자동차가 견뎌야 하는 한계는 성큼성큼 치솟는다. 각 부품의 내구한계를 바짝 높이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서다. 특히 차체와 서스펜션을 탄탄히 다져야 한다. 독일 차가 고속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는 비결이다. 반대로 넓은 대륙을 최단거리로 잇는 도로가 많은 미국은 전혀 반대 성향의 차가 어울렸다. 쭉 뻗은 길을 편안하게 달리려면 운전대와 조향바퀴를 잇는 연결을 약간 느슨하게 세팅할 필요가 있었다.

작은 조작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면 스트레스가 쌓이는 까닭이다. 굽잇길이 많지 않으니 서스펜션 역시 슬쩍 힘을 빼 나긋나긋한 승차감을 추구하는 편이 좋았다. 그래서 불과 20년 전만 해도, 블라인드 테스트도 먹힐 만큼 대륙별 자동차의 성향은 뚜렷이 달랐다. 작지만 단단한 독일 차는 골프, 호쾌하고 느슨한 미국 차는 머스탱, 잔고장 없어 신뢰할 수 있는 일본 차는 토요타 코롤라처럼 각 나라를 상징하는 아이콘 같은 차를 꼽기 쉬웠다. 이 모든 흐름이 길과 거기에서 비롯된 문화, 상황과 관련이 깊으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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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세기 전부터 길의 주인공은 사람이나 동물에서 자동차로 바뀌었다

 

의도적으로 자동차 세팅에
차별두기도

 

오늘날엔 그런 상식도 호랑이 담배 필 적 이야기가 되었다. 글로벌화가 가장 크게 기여했다. 더 이상 한나라에서 차를 만들어 안방시장에서만 파는 시대는 지났다. 신차를 기획하고 개발할 때부터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둔다. 따라서 지구촌 곳곳을 수놓은 길과 주행환경을 감안한다. 판매시장이나 수요층, 기획목적에 따라 구성에 의도적으로 차별을 두기도 한다.가령 ‘해치백의 교과서’로 불리는 폭스바겐 골프는 한때 모델에 따라 뒤 서스펜션을 토션빔과 멀티링크 두 가지로 나눴다. 이유는 하나다. 고성능 골프 R32 때문이다. 이 차는 사륜구동 방식이라 엔진에서 나온 힘을 뒷바퀴로 전할 드라이브 샤프트가 차체를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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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면 상태가 고르지 못했던 과거엔 스페어타이어가 필수장비였다


따라서 사륜구동 골프는 뒤쪽에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달아 중간에 공간을 마련해야했다. 마세라티는 한 술 더 떴다. 한때 콰트로포르테는 두 가지 구동계로 나왔다. 기본형은 엔진 뒤에 변속기를 붙였다. 반면 고성능 버전인 GTS는 변속기를 뒤 차축 바로 앞에 달았다. 차체 앞머리 무게를 최대한 덜어 핸들링 성능을 날카롭게 다듬기 위해서다. 최근엔 이런 경우를 찾기 어렵다. 원가절감과 생산 유연성을 위해 공용부품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한 차종을 두 가지 이상 구성으로 운영하는 제조사도 있다. 쌍용자동차가 최근 출시한 G4 렉스턴이 좋은 예다. 후륜 서스펜션을 이원화하여 기본형에는 리지드 액슬 타입의 5링크 다이내믹 서스펜션을, 고급형에는 멀티링크 타입의 멀티 어드밴스드 서스펜션을 채택했다. 자신이 주로 사용할 환경이나 목적에 맞춰 고를 수 있으니 선택의 폭을 넓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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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나 호주처럼 쭉 뻗은 도로가 많은 환경은 그곳에서 개발한 자동차의 성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길에 실시간 또는
미리 대응하는 기술

 

기술이 진화하면서 자동차도 나날이 똑똑해지고 있다. 그 결과 자동차는 이제 앞으로 다가올 길을 예상하고 대응하는 재주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꿈을 현실로 바꾼 주역은 내비게이션이다. 우리는 길 찾기 용도 정도를 떠올리는데, 사실 인공위성이 보내는 정보는 방대하다. 위치뿐 아니라 도로의 기울기와 굽이진 각도, 노면 상태를 샅샅이 파악할 수 있다.
BMW는 이처럼 알토란 같은 정보를 자동차의 기능과 짝 짓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 가령 코너 앞에서 운전자는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인다. 그러면 자동변속기는 운전자의 의도를 눈치 채고 기어를 내려문다. 이후 운전자가 다시 가속 페달을 지그시 밟으면 서둘러 높은 기어로 갈아타 엔진회전수를 낮춘다. 그런데 첫 번째 코너 이후 바로 또 코너가 나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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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의 성능은 나날이 치솟고 있다. 길 또한 이 같은 자동차에 발맞춰 진화하는 중이다


이땐 첫 번째 코너 진입 전 낮은 기어를 물고서 계속 버티는 편이 감속이나 재가속 양쪽에 유리하다. 지금까지 자동변속기가 상황을 판단할 근거 중 핵심은 운전자의 조작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길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자동차는 운전자보다 더 효과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 같은 논리를 밑바탕 삼아 BMW가 고안한 기술이 ‘예측변속시스템’이다. 

이 장치는 지도와 인공위성의 정보를 토대로 몇 단 기어를 물지 순간순간 판단한다. 이 기능은 서스펜션과도 맞물릴 수 있다. 예컨대 꼬부랑길이 다가올 땐 알아서 단단히 굳히고, 쭉 뻗은 구간에서는 부드럽게 풀어주는 식이다. 운전대의 답력과 기어비도 상황에 맞춰 바꿀 수 있다. 뜬구름 잡는 공상이 아니다. 머지않아 BMW가 신차에 적용할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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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기술이 진화하면서 자동차와 길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단계로 거듭나고 있다


서스펜션의 진화도 눈부시다.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MRC)’ 서스펜션이 대표적이다. 댐퍼 속엔 자성을 띤 금속입자 머금은 오일로 채웠다. 여기에 전기를 흘리면 금속입자가 오와 열을 맞춰 댐퍼 움직임을 뻑뻑하게 만든다. 그 결과 1,000분의 1초마다 승차감을 조절할 수 있다. 기술 발전과 더불어, 자동차와 길의 동행은 나날이 편안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