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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편집실·Photo 이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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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멎기 전까지

나는 멈추지 않는다

 

안정만큼 유혹적인 것이 있을까. 부단한 노력의 대가로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모두가 박수를 보낼 때 인간은 당연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한다. 조금은 편하게, 조금은 느슨하게 쉬어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 하지만 김용걸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돌아보면 언제나 도약하거나 달렸고, 때로는 떨림을 견디고 있었다.

 

발레리노

김용걸

現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발레전공 교수

前 파리 오페라발레단 솔리스트

前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2017 이데일리 문화대상 무용부문 최우수 작품상 “Work 2”

1999 대한민국 문화훈장 화관장

1998 프랑스 파리국제무용콩쿠르 2인무 부분 1위

1997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3위

 

 

천재 발레리노의 무모한 도전

슬럼프 없는 속주. 김용걸의 발레 인생은 그랬다. 중학교 2학년 겨울, 어머니가 그를 무용수의 길로 인도한 이후 발레 소년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도약, 도약뿐이었다. 예고 졸업과 대학 입학, 국립발레단 입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주연이었다고.

“노력하는 대로 다 됐어요. 다른 무용수가 열 번 연습해야 되는 동작이라도 저는 두세 번이면 완성됐어요. 신체적 조건도 우월했고요.”

국내, 국제 콩쿠르에 그의 이름 세 글자가 눈부시게 수놓아졌다.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끌다’, ‘최고의 발레리노’, ‘하늘이 내린 무용수’ 등 흥분한 평론가와 기자들이 그를 격찬했다.

하지만 모험가의 인생이란 좀 피로한 것일까. 그는 도전을 사랑했다. 김용걸은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2000년 ‘발레의 종가’,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다. ‘발레의 종가’. 세계 최고의 무용수들이 모인 공간에서 ‘동양인 최초 입단’이라는 타이틀은 그다지 빛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기분을 매일 체감해야 했다. 당시의 어려움을 묻자 그는 잠시 숨을 고른다.

“‘살았다’라기 보다는 ‘버텼다’라는 표현이 적합할 거예요. 모든 게 혼돈 그 자체였달까요. 다섯 달의 수습생 시절에는 ‘벼랑 끝으로 오라’는 제목의 프랑스 시를 외우며 버티고 버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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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니션에서 진짜 예술가로 거듭난

파리에서의 삶

스물일곱 청년 김용걸이 마주한 생애 가장 가파른 굴곡.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섰던 그에게 ‘가장자리’는 어떤 의미였을까. 마치 ‘회사의 말단 직원’이 된 기분으로 매일을 견디었다.

“파리 콩쿠르 1등, 모스크바 콩쿠르 동양인 최초 1등 같은 수상 경력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어요. 현재 실력만이 중요했죠.”

마음의 부담은 몸을 무겁게 한다. 아주 단순한 동작도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유연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기로 마음먹자, 오히려 움직임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최고인 걸 인정하기로 했어요. 이후 다이어리에 제 마음을 매일 세세히 적었습니다. 창피한 마음까지도 아주 솔직히 써 내려간 시간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돌아보니 제 민낯이 모두 드러난 그 기록들이 저를 살린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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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동시에 황홀도 존재했다. 파리는 예상보다도 더 예술적인 공간이었다. 매일이 경탄이었다. 예술이 인생이고 인생이 예술인 독특한 나라에서, 그의 매일은 즐거운 컬쳐 쇼크 자체였다. 그러다 무리한 연습이 다리에 잔금을 만들었다. 쉬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못 견디고 자꾸 연습하다 보니 완전히 금이 갔다. 재활과 복귀를 오가는 시간이 이어졌다. 무용을 못 하는 데 절망하는 대신 ‘연습실 밖으로 나가 다른 예술을 만날 시간’으로 재정의하기로 했다.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바이크를 타고 파리를 쏘다녔어요. 파리는 사람을 자극해 예술가가 되도록 만드는 신비한 도시죠. 큰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 종일 음악을 듣고, 프랑스 영화를 엄청 봤어요. 그 시간들이 저의 예술관에 각별한 영향을 미쳤지요.”

피나 바우쉬의 공연에 출연하면서 그는 춤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

“한국 예술가들은 테크닉에선 최고예요. 그런데 예술은 테크닉만으로는 안 돼요. 예술가란 창조성 자체여야 하죠. 피나 바우쉬의 영향으로 춤에 자신의 철학을 담는 법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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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사회를 알아야 춤에

철학을 담을 수 있다는 믿음

그의 선택은 옳았다. 입단 5년 만에 김용걸은 솔리스트 레벨에 올랐다.

“프랑스에서의 경험은 제 인생 최고의 ‘move’ 였어요. 모든 게 한국과 다른 나라에서의 예술 경험은 제 발레를 아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어요. 기교나 기술의 우월함을 넘어, 표현력이 뼛속까지 변화했죠. 발레란 감정과 생각을 담아서 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다시 고국에 발을 디딘 것은 2009년이었다. 42세가 정년인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남은 5년의 세월을 포기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돌아온 것. 그는 그동안과 다른 스텝으로 움직였다. 무용수에서 교육자로, 다시 안무가로 행보를 확장했다.

“학교는 나름의 재미가 대단했어요. 재능이 돋보이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죠. 무대에서 만큼의 희열이 찾아왔습니다.”

2년 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워크>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안무가의 길을 걷게 됐다. ‘김용걸 댄스 시어터’가 창단됐고,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수치심에 관한 기억들>, <빛 침묵 그리고...> 등의 작품을 통해 세상과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말과 글로 사회적 발언을 한다면 그에게는 무용이 세상과 교감하는, 사회를 조금이라도 변화하게 하는 도구다.

그는 학생들에게 늘 ‘연습실 밖으로 나가서 스스로를 만나라’고 조언한다. 무용을 잘하는 사람을 넘어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발레는 틀이 엄격한 예술이다. 하지만 그 틀에만 익숙해지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틀을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마주한 뒤 다시 그 틀에 돌아와야만 관객을 진정으로 감동시키는 무용수가 될 수 있다. 그 또한 스스로 그 지침을 실천하며, 무용수로, 안무가로, 교육자로 매일 도약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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