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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

Writer. 임병희 _<나를 지키는 힘>, <인문라이더를 위한 상상력사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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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움직인다.

고로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움직임은 멈춰 선 것과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것은 단지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의 속도와 거리도 아니다. 핵심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이다. 궤도를 벗어난 작은 움직임이 당신의 삶에 나비효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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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삶을 채우는 가치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칸이 러시아 원정을 떠났을 때, 몽골 기병의 행군거리는 하루 최대 151㎞에 달했다. 그들은 질풍처럼 달렸고 반격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멈추었을 때, 몽골의 영화도 함께 끝이 났다. 그건 마치 “나의 후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 살 때, 내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라고 한 칭기즈칸의 예언과 같은 것이었다.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세우기 전 또 다른 예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 돌궐의 명장이었던 톤유쿠크(Tonyuquq)는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유목민족만이 살아남았어야 했고 땅을 일구고 정착해 살아온 정착민들은 모두 망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건 움직임이 단지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착민은 그들의 방식으로 식량 생산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등 끊임없이 진화하는 삶을 위해 움직여왔다.

하루 151㎞의 이동 거리가 대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마우스는 내 책상 위를 떠나지 않지만 그 작은 움직임은 세계를 떠돈다. 하지만 그 큰 인터넷 세상에서도 정처 없는 유영은 의미를 만들지 못한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적인 움직임은 시간 위를 마냥 걸을 뿐이다. 움직임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의지가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 역동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단지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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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를 벗어난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바꾸다

어렸을 적, 집에 괘종시계가 있었다. 시계의 추가 움직일 때마다 시간이 흘렀다. 태엽이 다 풀리면 ‘끼리릭’ 소리가 나게 태엽을 감아주어야 했다. 어느 날 시간이 너무 늦게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빨리 가면 밥도 빨리 먹고 잠도 빨리 잘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꾀를 내었다.

시계추가 무거워지면 시간이 빨리 갈 것 같았다. 동전을 모아 시계추에 칭칭 감았다. 하지만 시간은 빨라지지도 늦어지지도 않았다. 사실 진자운동에서 주기를 결정하는 건 추의 질량이 아니라 진자의 길이이다. 그때 진자운동을 이해했더라면 진자의 길이를 늘이는 모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진자는 똑같은 궤적을 움직인다. 속도와 이동 거리에 상관없이 정해진 궤적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해진 움직임, 똑같은 주기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는 주기를 벗어난 움직임에서 생긴다. 세상을 바꾼 움직임, 세상의 변화를 만든 움직임은 궤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탐험가들은 정해진 길을 가지 않았다. 한 번도 가지 않은 항로로 배를 몰았고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세상을 바꾼 철학과 사상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이기를 거부했기에 새로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을 열 수 있었다.

변하고 싶다면 궤도 밖으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갈구하면서 한편으론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는 움직임 자체가 아니라 그 움직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에 주저하지 말자. 오늘과 다른 내일은 오늘의 움직임에서 나온다.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은 결과이며 또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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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미래를 향한 과정, 그 위의 걸음

우리는 모두 과정을 살고 있다. 현재 이룩한 하나의 결과도 다음 결과를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여행을 갔을 때, 목적지는 다시 돌아오기 위한 분기점이다. 다시 돌아온 도착지는 또 다른 이동의, 경험적 확장의 분기점이 된다. 우리가 취하는 움직임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은 경유지일 뿐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소설가 닥터로우는 “소설을 쓰는 것은 밤에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춰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극적인 변화를 원한다. 한번 먹은 마음이 내일로, 또 모레로 이어져 사흘을 넘기고 일주일을 넘기고 한 달, 일 년이 되도록 노력하기보다는 오늘 마음먹고 극적으로 변한 일 년 후를 상상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움직이는 과정 없이는 어떠한 결과에도 도달할 수 없다.

자동차도 그렇게 움직여왔다. 1769년 니콜라스 조셉 퀴뇨는 최초의 증기 자동차를 발명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자동차의 효시다. 하지만 그 이전인 1599년 시몬 스테빈이 풍력 자동차를 발명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82년 태엽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 발명의 움직임들은 모두 결과가 아니라 현재 자동차가 있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지금도 자동차는 시대 흐름에 맞게 과정을 밟아나가는 중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또 다른 형태의 움직임을 지속해나갈 것이다.

자, 같은 궤적만을 반복해서 움직이는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똑같은 태엽이라도 다빈치는 최초의 자동차를 움직이는 태엽을 감았다. 나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덮어두었던 생각, 묵혀두었던 다짐 속에 내 움직임의 방향이 있다. 나를 움직이는 태엽을 감아보자. 그럼 다시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될 것이다. 움직이는 하루하루가 또 다른 에너지가 되어 나를 다르게 움직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