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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원석 _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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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피아노 배틀이라는 연주 대결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린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특히 배틀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이 합주할 때 피아노 내부와 피아니스트를 교차로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복잡한 피아노 내부에서 수많은 해머가 올라와 현을 타격하는 장면은 기술과 예술의 완벽한 융합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피아노가 ‘악기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피아노를 발명한 기술자뿐만 아니라 악기의 성능을 개선하고 활용하기 위한 많은 음악가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프의 사촌 피아노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1999년 발매되어 큰 인기를 끈 ‘펌프’ 게임의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곡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룹 ‘반야’의 작곡가 오상준이 작곡한 이 곡은 경쾌한 락 버전과 스타크래프트 버전 등 다양한 편곡 버전이 존재하는데, 지금도 각종 경기나 행사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며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곡명에 베토벤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비창 소나타(Grande Sonate path tique)>의 3악장을 리메이크했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는 <비창>을 비롯해 32곡이 있는데, 피아니스트의 신약성서라고 불린다. 우린 흔히 ‘베토벤’하면 작곡가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베토벤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은 작곡가 이전에 이미 유명한 비르투오소(매우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춘 대가를 일컫는 말)였다. 신동이라고 불렸던 모차르트를 비롯해 바흐나 베토벤,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쇼팽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탁월한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대중음악 공연에 버금갈 만큼 그들의 연주회가 인기를 얻는 데는 피아노의 역할이 컸다.

피아노는 오르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악기다. 발음 원리상 오르간은 피리와 같은 관악기, 피아노는 하프와 비슷한 현악기에 가깝다. 그래서 피아노는 오르간의 변형이 아니라 클라비코드(Clavichord)나 하프시코드(Harpsichord)가 발전된 악기다. 클라비코드는 음량이 작아 가정에서 일부 사용되었고, 17세기에 접어들면서 하프시코드가 점차 널리 사용되었다. 1709년 이탈리아의 하프시코드 제작자였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는 ‘여리거나 세게 소리를 낼 수 있는 하프시코드, 그라비쳄발로 콜 피아노 에 포르테(Gravicembalo col piano e forte)’라는 새로운 악기를 발명한다. 긴 이름의 이 악기는 줄여서 ‘피아노포르테(Pianoforte)’ 또는 ‘피아노’라고 불리게 된다.

피아노가 기존의 하프시코드와 가장 큰 차이점은 해머 액션(Hammer Action)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건반과 현 사이에 있는 구조를 액션이라고 하는데, 해머라는 망치가 현을 직접 때린다. 처음에는 해머를 나무로 중심부를 만들고 양가죽이나 쇠가죽으로 감아서 만들었다. 나중에는 해머를 섬유의 일종인 압축한 펠트로 감싸면서 소리가 한층 부드럽고 풍요로워졌다.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면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해머가 현을 치는데, 이때 타건 속도를 조절하여 셈여림을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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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사랑한 피아노

 

피아노는 클라비코드나 하프시코드로는 연주하기 어려웠던 소리의 셈여림을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악기였지만 크리스토포리의 조국인 이탈리아에서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독일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서 다양한 기술자와 작곡가의 협업을 거치면서 꾸준한 개선이 이루어져 악기의 왕이라는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악기인 피아노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모차르트였지만 적극적으로 개선하여 작곡에 활용한 것은 베토벤이었다. 평생 다섯 대의 피아노를 소유했다고 알려진 베토벤은 피아노가 낼 수 있는 음역을 최대한 이용해 곡을 썼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베토벤이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능을 개선하고 대중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피아노를 배울 때 기본적인 기술을 연마하는 연습곡을 작곡한 이가 베토벤의 제자인 체르니였다는 것만 봐도 베토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건반악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가가 한 사람 더 있다. 바로 바흐다.

바흐는 피아니스트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작곡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곡들은 18세기에 사용되던 건반악기를 위해 바흐가 작곡한 것이다. 18세기에 클라비어(Clavier)는 건반으로 된 오르간이나 클라비코드와 쳄발로 그리고 새롭게 발명된 피아노 같은 악기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비르투오소 오르가니스트였던 바흐가 건반악기를 위한 곡을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은 당시 새로운 조율 체계였던 평균율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바흐는 두 개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통해 평균율로 조율한 건반악기로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이 덕분에 바흐 이후 건반악기뿐만 아니라 음악에서 평균율을 널리 사용하게 된다. 평균율로 조율한다는 뜻은 모든 건반 사이의 음높이 차이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바흐 시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수학을 조금 알면 평균율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좋다. 피아노를 조율할 때 기본음으로 사용하는 것은 49번째 건반이 내는 ‘라’ 음이다. 흔히 ‘라(A)’ 혹은 ‘49(A)’로 표기한다. 그 건반을 쳤을 때 나는 소리굽쇠의 진동수는 440Hz. 따라서 이 음보다 한 옥타브(Octave) 높은 소리인 61A는 880Hz의 진동수를 갖는다. 같은 원리로 한 옥타브 낮은 소리는 1/2배의 진동수를 갖는다. 이렇게 두 배의 진동수를 갖는 배음 관계의 소리는 같은 음정으로 들린다. 이명동음(異名同音)의 관계가 성립하는 음들은 다른 진동수를 가진 음들이지만 모두 같은 계이름을 가진다.

즉 220Hz, 440Hz, 880Hz 모두 A(라)라는 계이름으로 부른다. 문제는 모든 건반에 이런 관계가 성립하려면 반음 사이에 같은 음정비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옥타브 내의 12음들은 모두 반음의 음정비율을 가지고 있으며, 약 1:1.06(1:1.05946)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평균율이다. 오늘날 서양 음악이 바로 평균율을 사용하여 조율하게 되는 데는 바흐의 공이 컸다. 1만 개에 가까운 부품을 사용하는 가장 정밀한 예술적 기계인 피아노. 오늘날 환상적인 피아노배틀을 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음악을 표현하려 했던 음악가와 악기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발명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