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logo

닫기

모바일메뉴

logoSSANGYONG

Theme Interview

Writer. 편집실 / Photo. 도현석 / Cooperation. (주)엣나인필름, (주)인디스토리

11.jpg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김종관 영화감독

 

화면 가득 하얀 부유물이 액체 속을 이리저리 떠다닌다. 관객들이 이 부유물의 정체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동안, 장면은 문득 전환된다. 플랑크톤이 떠다니는 어항 속 같던 장면의 정체가 드러난다. 카페에서 손님이 떠난 뒤 자리에 남겨진 유리잔 속 풍경이다.

우리 곁에 있지만 극도로 가까이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는 작고도 아름다운 세상. 영화 ‘더 테이블’의 인상적인 첫 장면이다. 자연스레 관객은 이 조그마한 세상의 의미에 골몰한다. 그때 감독은 유리잔의 바깥세상으로, 그리고 화면 밖 세상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낸다.

영화 ‘더 테이블(The Table)’, ‘최악의 하루’를 연출하고 시나리오를 쓴 김종관 감독을 서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작품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장소다. 오후의 노란 햇살이 반쯤 드리운, 영화 속 주인공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그는 또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다고 했다.

 

 

공간을 조각으로 잘라내
집요하게 들여다보다

 

낮은 건물들 사이 거미줄처럼 엮인,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법한 골목길. 한쪽 구석에는 기우뚱한 전신주가서 있고 바닥에는 일방통행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하얀 페인트 얼룩은 이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을 누군가를 상상케 한다. 김종관 감독이 그의 책 ‘골목 바이 골목’에 수록한 아주 평범한 동네 골목의 모양이다.

하지만 시선을 낮춰 페인트 자국을 따라 움직이자, 늘 보던 평범한 공간이 돌연 낯설고 거대해진다. 한참 페인트 자국을 따라가 그가 도착한 곳은 작고 낡은 집 앞이었다.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그 구석에서 그는 ‘하얀 자국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렸다.

 

13.jpg

 

“그 집에 치매 노인이 사는 거예요. 기억이 가물거려도 그 페인트 자국을 따라 걸으면 집으로 올 수 있게 만들어둔 거 아닐까 하고.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사연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그럴 듯하다. 이야기꾼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역사와 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을 엿본 듯하다. ‘지어낸다는 것’은 모름지기 작은 것을 크게 보고 큰 것을 작게 보는 노력에서 출발할 테니까. 일상의 사소한 흔적이 감독의 현미경과 집요한 관찰을 통해 짧고 긴 이야기가 된다.

남산 둘레길, 노인들이 나와 앉은 좁다란 서촌 골목길. 김종관 감독의 작품에서는 같은 공간이 자주, 계속해서 등장하곤 한다. 그럼에도 매 순간 다른 빛깔과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그의 매력이다.

2016년 개봉한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도 공간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서울의 풍경, 특히 남산을 아름답게 보여준 영화로도 유명하다. 주인공 은희는 영화 내내 줄곧 남산에 머무는데, 그녀가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남산의 모습은 다채롭게 바뀐다. 낮에서 밤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활기차고 친근한 분위기에서 두 남녀와 가로등 불빛만 어스름한 고즈넉한 분위기로.

 

14.jpg

 

하루 동안 카페의 한 창가 테이블에 머물다 간 네 인연의 이야기를 다룬 ‘더 테이블’에선 이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비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풍경 변화를 통해 인물의 심리가 묘사된다. 찻잎에서 홍차가 붉게 우러나 물속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같은 ‘소품 클로즈업’ 장면을 통해 분위기의 변화와 이야기의 흐름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표현된다. 같은 장소를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장면이 뜻하는 바도, 장면이 주는 분위기도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15.jpg

 

“‘더 테이블’은 중요한 콘셉트 중 하나가 ‘확대’예요. 그런데 넓게 보여주는 확대가 아니라 조각으로 잘라서 보여주는 확대인 거죠. 인물이나 상황의 전후 맥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 하나의 상황만 보여줍니다. 앞뒤가 잘려있죠. 또 클로즈업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도 일종의 잘라내기예요. 외부를 다 잘라냈잖아요. 잘라내어 보이지 않는 부분을 관객이 나름대로 예측하면서 보는 거예요. 거기서 영화적 재미가 생길 거라고 봤어요.”

익스트림 클로즈업. 클로즈업 기법 중에서도 아주 극도로 좁은 영역까지 확대해 들어가는 기법이다. 김종관 감독이 익숙한 장소에서도 낯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때문에 ‘더 테이블’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매체를 통해 ‘잘라내기’와 ‘확대’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에게 특히 사랑받은 영화가 됐다.

 

 

매체를 넘나들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다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김종관 감독은 실패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라는 작품을 제작한 후, 상업영화에 도전하려고 했는데, 투자가 무산되면서 방황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글을 쓰고 사진을 찍게 됐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16.jpg

 

 “글로만 창작해 오신 분들이 물론 깊이 있는 글을 쓰시겠지요. 하지만 영화를 근간으로 해 온 시간을 바탕으로 쓴다면 차별성 있는 글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는 소설 창작과 다르다. 인물의 신상, 심리, 그가 처한 상황을 글로 풀기보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등장인물의 기분이 나쁜 상태라면 직접적으로 ‘기분이 나쁘다’는 대사나 내레이션을 하도록 표현하는 것보다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길거리에 떨어진 빈 깡통을 세게 걷어찬다는 식의 서술이 필요한 것이다. 김종관 감독은 영화 특유의 시각성에 문학의 사색과 사진을 더해 새로운 작법의 글을 차곡차곡 써 내려갔다. 이제 그는 감독일 뿐만 아니라 네 권의 저서를 낸 어엿한 작가다. 

 

17.jpg

 

“영화 외의 창작이 저한테는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이었어요. 4년 정도 그렇게 지냈는데, 그때는 소모적으로 지내는 것 아닌가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앞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를 얻은 시간이 됐습니다.”

소설가가 시를 쓰고, 평론가가 에세이를 쓰는 것과는 좀 다른 변주다. 김종관 감독은 글과 사진, 그리고 영화라는 각자의 고유성을 지닌 다른 매체의 벽을 넘나든다. 같은 주제라도 완전히 색다른 관점으로 표현하다 보니, 이야기는 보다 풍부하고 능란해졌다.

“글과 사진을 하면 그 결과물이 자연스레 영화 안에 녹아들어요. 정말 좋은 일이죠. 서촌에서 7년 정도 살면서 ‘골목’이라는 주제로 매거진에 글을 연재했거든요.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를 모아서 나온 작품이 ‘최악의 하루’예요. 그리고 그 글들을 모으고 다듬어서 ‘골목 바이 골목’이라는 책도 내게 됐고요.”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아이러니로
공감을 이끌어내다

 

“사람은 굉장히 약한 존재예요. 때론 불완전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그런 부분을 드러내고 왜 그럴까 생각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종관 감독은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주인공 은희가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거짓말로 인해 현 연인과 전 연인 사이에서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이야기를 다룬다. 극 중에서 모든 위기는 은희가 자초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한 거짓말들을 정리하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그녀를 마냥 얄밉게 볼 수는 없게 한다. ”제 스스로에 대해 결함을 많이 느낍니다. 살면서 실수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 이상한 사람을 봐도 연민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다들 인간적으로 옳은 것만하는 게 아니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하게 되는 순간들을 겪잖아요.“

김종관 감독은 작품 속에서 인물들을 윤리적으로 판단해 선과 악으로 가르지 않는다. 관객들은 화면을 보다가 스스로를 바라본다. ‘저런 모습이 내 안에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극 중 인물에게 공감과 이해를 표한다. 예컨대 은희가 전 연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지금은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도 관객은 은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8.jpg

 

“누군가는 은희를 이해할 거고, 누군가는 그녀를 참 이상한 여자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은희의 심리가 어쨌든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그런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긴 어려울 거예요. 맘속에 간직만 하느냐 실행에 옮기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오래 곁에 있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감독의 돋보기를 통해 익숙한 사물과 사람과 세상을 문득 낯설게 보여주는 수단이 아닐까. 

“세상을 보는 태도가 나날이 바뀌어요. 선입견이 깨져서 유연해집니다. 그게 좋아요. 자신을 깨면서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편안하고 익숙한 각도에서 벗어나, 낯설어져서 더 유쾌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창작자로서의 시선을 매일 벼린다. 김종관 감독이 세상을 보고 그려 나가는 과정이다.